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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진주성 전투

기사입력 2021.04.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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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년전에 필자가 촬영한 남강과 촉석루 전경

     

    현재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지이다. 또한 교육도시이며 선비의 기풍이 살아 숨쉬는 문화의 요람이기도 하다.

    특히 명문고로 국립학교로는 진주고, 진주고보다 역사는 일천하지만 사립학교로는 진주대아고가 지역의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면서 현재 쌍벽을 이루고 있다.

     

    필자와 경찰간부후보생의 동기인 어청수 전)경찰청장, 전)경호처장이 진주고 출신이다. 또한 40여년 넘게 오래도록 교분을 쌓아온 故 亞人 박종한 선생(대아고등학교설립자)의 차남인 박창수 대표(제일옥션운영,고미술품판매)가 대아고 출신이다.

     

    더불어 진주는 필자와 인연이 있다. 필자가 경찰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첫 부임지가 진주이기 때문이다. 추억속에 있는 곳이지만 항상 제2고향 같은 포근함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는 조선시대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임진왜란시 왜군들이 진주성을 필히 점령하고자 했던 이유는 진주를 거점으로 호남으로  진출하여 병참기지를 확보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접수하여 군량미를 조선에서 조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야 조선에서 장기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성 전투는 1차, 2차로 두번 있었다. 1차 전투(1592.10.05~10.10)는 1592년 음력10월(선조25년)이다.  조선군은 김시민 진주목사의 지휘하에 약 3800명이었고 일본군은 약 3만명이었다. 

     

    전투는 6일간 공방전을 치렀는데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중과부적인 병력으로도 수성이 가능했던 것은 진주성이 지형적으로 천혜의 요새였고 또한 외곽에서 의병들이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협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김시민목사는 전사하였다. 
     
    ▲ 임진왜란 3대첩(행주대첩, 한산도대첩, 진주성대첩)중 진주성대첩은 이 1차전투를 말함. 
     
    2차 전투는 1593년 6월(선조26년) 음력 6.22~29(7일간)있었다. 조ᆞ명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남하하는 왜군들은 진주성 함락을 목표로 진주로 10만명의 왜군이 총 집결하였다. 

     
    1차 전투시 패배했던 원한을 갚기위한 이유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토요토미의 지시가 하달된 것이다. 
     
    반드시 진주성을 함락시켜 호남 곡창지대로 진출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 호남ᆞ경상을 거점으로 장기전에 돌입하라는 군령이었다.  따라서 조선침략의 선봉장인 고니시,가토 등이 10만의 왜군들을 몰고 진주로 집결했다. 그러나 우리 조선군은 의병포함 약 6천~7천명에 불과했다. 
     
    진주성은 왜군의 집중포위로 외곽지원이 불가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그렇타고 조정에서 지원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진주성안의 군사 및 백성들은 결사항전의 길밖에 없었다. 

     

    외곽에서 게릴라전술로 활약하던 의병장 곽재우 장군도 진주성 근처까지 갔으나 왜군의 숫가 너무 많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지원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왜군들도 성을 잠시 비워주면 우리가 잠시 점령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회유도 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들 즉, 충청도병마사 황진,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등의 장수들이 단호히 거절하자 결국 7일간에 걸쳐 사투가 벌어졌다.

     

    우리 조선군은 숫자적으로 불리한 나머지 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조리 죽이라는 "토요토미"의 지시데로 성안의 군사 및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을 당했다. 
     
    진주인들은 일본과는 악연인 셈이다. 당시 의병을 포함 외지인들도 많았으나 진주인들은 목숨보다 소중한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각오로 결사항전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도 진주인들은 유하면서도 강하다. 그리고 보수적이다.  시대는 바뀌었으나 인걸들의 그 강인한 기질은 영원하다. 
     
    성이 함락되자 전라도 화순출신 경상우도병마사 최경회 장군, 나주출신 의병장 창의사 김천일장군 등이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을 한다. 논개는 최경회 장군의 후처로 역사는 추정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필히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크게 침략한 것은 2회인데 임진왜란이 그 첫 번째이다. 그들은 기어코 조선말기에 대한제국을 손에 넣고 36년간이나 우리를 지배했다.

     

    현재도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 등의 상흔들이 가시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반성은 커녕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없다. 우리와 지속적으로 악연을 이어가겠다는 심산인 것 같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서 백번 다 이긴다는 말이다. 앞으로 자라나는 우리 후손들이 선조대에 겪어온 아픔을 두 번 다시 겪지 않토록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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