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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의 한사람인 선비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생애

기사입력 2021.02.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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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타임뉴스 = 김두만기자] “시습”의 뜻은 바로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매월당이라 불리는 이유는 경주의 남산 즉. 금오산에 토굴을 짓고 매화를 심었는데 이 토굴이 ‘금오산실’ 또는 ‘매월당’이라고 했으며 이런 연유로 그의 호가 매월당이 된 것이다.김시습은 선비출신으로 방랑천재시인이다. 그리고 그는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금오신화」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유교의 철저한 속박에서 벗어난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고 또 누구보다도 애민의식에 철저했으며 불우한 사람들의 벗이었다. 당시 조선의 시대적인 상황은 비합리적인 토지제도 개혁으로 새로운 지주가 생겨나고 농민들은 점차 토지를 잃게되며 과도한 조세 등의 부과로 민초들은 비참한 생활로 회귀하고 있었다.또한 공신들은 많은 토지와 큰 저택을 소유하게 되고 권세와 위세를 부리면서 그 자녀들은 음사(蔭仕)의 벼슬을 받았다. 이런 속에서 수양대군은 자신이 영의정 자리를 보전하면서 권력을 흔들고 한명회 등 무리들과 음모를 꾸미고 세종이 집현전을 무대로 키워놓은 학자들을 탄압하였다.그러다가 1455년(단종3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그의 생애에서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게된다. 영달을 누릴 수 있는 벼슬을 포기했고 비탄에 젖은 그는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끝내 방랑의 길을 선택하게된다.그는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사는 방외인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방외인(方外人)은 사림(士林)과 차별화 된다. 사림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향리로 돌아가서 독서를 하다가 정세(情勢)가 흡족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슬슬 조정에 나와 절개와 지조를 자랑하는 일종의 시대조류에 맞춰사는 선비이다. 그러나 방외인은 사회적 통념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몸가짐을 흐트러뜨리며 아무렇게나 살았던 선비이다.경주의 남산 곧 금오산에 폐허가 된 빈 절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용장사(茸長寺)였다. 절이 폐허가 되었고 인적이 드문 이곳에 토굴을 짓고 주변에 매화를 심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거주하였다.한편,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유명한 권신 한명회가 지어놓은 시(詩)의 현판을 보고 그 시를 고쳐 한명회를 우회 비판한 그 재주는 후세에도 천재시인으로 기록하고 있다.한명회는 늘그막에 한강가에 화려한 별장을 짓고 압구정이란 현판을 걸어놓았다. 지금의 압구정동은 그때의 현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김시습이 강에 갔다가 현판에 써진 시를 보고 이를 고쳤다(매월당집)◉ 당초 ▲ 靑春扶社稷(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 白首臥江湖(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수정 ▲ 靑春危社稷(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 白首汚江湖(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즉, 부(扶)자를 위(危)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놓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맞는 말이라고 수군거리자 한명회는 아예 이 현판을 없애버렸다고 한다.또한 그는 성리학에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며 당시 이원론의 주류를 이룬 일반적인 학설에 큰 반기를 들었다. 즉, 만물은 선으로 구성된 ‘기’로 이루어진다고 보면서 선악의 혼잡으로 보는 이원론과 차별화 하였다.따라서 그는 물질이나 현상이 정신을 좌우한다는 논리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인간은 기에서 태어난 평등한 존재라는 논리로도 발전하는 것이다.훗날 그가 죽은 지 89년 뒤에 선조는 그의 충절을 기려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이이로 하여금 「김시습전」, 윤춘년으로 하여금 「매월당전」을 짓게 하여 그의 사상을 기렸다. 또한 정조는 그가 죽은 지 289년 뒤에 이조판서를 증직했고 이어 여러장소에 생육신과 김시습을 기리는 서원과 사당이 세우게 하였다.그는 분명 조선 전기의 현실 모순에 대한 철저히 저항하는 시인이었고 사상가였다. 요새말로 치면 제도권에 나아가 개혁을 부르지지 않고 재야에 뭍혀 세상를 고발하고 민중속에서 민중을 대변한 인물이 아닐수 없다. 얼마전에 영면하신 백기완 선생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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