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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忠肅公) 김수연(金壽延) 將軍의 조명

기사입력 2020.12.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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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타임뉴스 = 김두만기자] 장군(將軍)은 문경공 휘(諱) 탁(琢)의 증손(曾孫)으로 1405년 나주 관동면(현 광산구 평동) 용강(龍崗)에서 출생하셨다.

     

    증조부이신 휘(諱) 탁(琢)은 가락(駕洛)의 시조(始祖) 김수로왕 및 흥무왕 김유신 장군의 후예로써 고려말 공민왕조에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현재 국무총리급,시호:문경공)을 지내시고 후일 나주 회진면 시랑동으로 낙향하시어 오늘날 시중공파(일명:문경공파)의 일가를 이루신 중조(中祖)이시다.

     

    장군의 휘(諱)는 수연(壽延), 자(字)는 수형(壽亨), 호(號)는 용강(龍崗),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이며 현재 나주시 대호동 동신대학교 교정에 묘소가 모셔져 있다.

     

    장군께서는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서 살펴본바 세종16년(1434년) 알성시 무과에 장원급제하신 후 초임 군관시절인 1435년에 북방 여연성 등에서 최윤덕장군과 함께 야인(野人)들을 격퇴한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연이어 전공을 세워 여연, 우예, 자성, 무창 등 4군(郡)을 개척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우셨다.

     

    ▲ 조선왕조실록: 世宗 63卷, 16年【1434 甲寅 / 명 선덕(宣德) 9年】3月9日(丙戌) 取 文科 崔恒 等 二十五人 武科 金壽延 等 十人。 

    ▲ 문과에서 최항 등 25명과 무과에서 김수연 등 10명을 선발하다.

     

    김수연장군 묘소.jpg

     

    이어 1438년에는 함길도절제사인 김종서장군과 함께 지경흥군사(知慶興郡事)로 재임하면서 특이한 무재(武才)로 출전한 전투마다 승전하고 백성을 물심양면으로 무휼(撫恤)하였으며,1443년에는 상호군(어모장군)으로 보청포전투에서 여진족을 대파하여 승리를 거둔바 우찬성 황보인의 장계로 승임(陞任) 하셨을 뿐 아니라 온성, 경원, 종성, 회령, 경흥, 부령 등 6진(鎭)에 성곽 및 장성을 쌓아 두만강 이남에 이르기 까지 오늘날의 국경을 확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다.

     

    그리고, 1447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1450년 판삭주도호부사 (判朔州都護府使,종3품),판영변대도호부사(判寧邊大都護府使,정3품)에 재수되셨고, 이후 5위 도총관 겸 7도병마사, 1451년에는 왕궁의 숙위와 경비를 관장하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에 오르셨는데,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면서, 김종서, 황보인과 가깝다는 이유로 쇠락의 길을 걸으셨다.

     

    그 이후 1455년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이 왕위에 오르자 평소 저술한 대소문자(大小文字: 동국병감)를 모두 소각하시고 절곡(絶穀) 6일 만에 절명(絶命)하셨다.

     

    세조는 이를 두고 "후세에는 충신이로다.”라며, 명하여 "전)동지중추원사 김수연이 졸(卒)하였으니 이에 조문하고 부물(賻物)도 함께 보내라 하였으며 예장(禮葬)하였다”라고 문헌은 전하고 있다.

     

    장군은 세종조에 탁월한 무인(武人)으로써 지략과 기개가 남달라 당시 최윤덕, 김종서 장군 등을 도와 사군육진(四郡六鎭)을 개척한 공이 지대하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손위(遜位)하자 죽음으로 저항 했던 충(忠)과 효(孝)가 역사적으로 귀감이 되는 바 후일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재수받았다.

     

    묘소는 세조조에 치조 치부 (致弔 致賻) 예장(禮葬)된 이후 무려 56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져 왔고,"제주목사와 진구렁마을”이라는 전설과 함께 대표적 풍수지리학적 명당으로 오늘날에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따라서 묘소를 중심으로 동신대학교가 세워졌지 않았나 싶다.

     

    슬하에 장남 휘 好仁은 나주 금안동 암헌 신장(申檣)의 문인으로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년에 치러진 생원시(生員試)에 서거정, 신숙주 등과 함께 합격하시고 영암에서 敎導생활을 하시다가 문종 즉위년(1450) 경오(庚午)에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2위로 홍윤성 등과 동방 급제(同榜及第)를 하여 대마도 경차관, 제주목사를 역임하셨으며 증(贈) 이조판서이다.

     

    2남 好義는 사헌부 집의하고, 3남 好禮는 진사 참봉을 하였으며, 4남 好智 강원 감사, 함흥부윤을 지냈다.

     

    또한 사위는 제주인(濟州人) 한림학사(翰林學士) 양발(梁潑)이며 그 증손이 담양 소쇄원의 소쇄처사 양산보이다.

     

    아울러 중종조에 이르러 증손 김안복은 기묘사화 당시 임붕 등 성균관 유생으로 정암 조광조를 구명하기 위해 유생 200여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가 몽둥이를 맞고 추방을 당한 후 나주출신 선비 11인과 금강계를 조직하여 항거했으니 위와 같은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해동야언, 열조통기, 서정록, 국토개척사, 조선사략, 증보문헌비고, 나주군지, 영광.함평군지, 경북의성군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대에 이르러 장군의 5대손인 휘(諱) 희수(希壽)장군도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가 이끄는 3만의 왜군을 맞이하여 부산 동래성전투에서 진력을 다해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송상현 부사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여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신바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천일(金千鎰)장군의 부인도 공의 고손녀(高孫女)이시다. 김천일 장군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셨는데 현재 나주시 대호동 소재 정렬사에 배향되셨다.

     

    김수연장군 묘소앞에서.jpg


    끝으로 장군께서는 평생을 4군6진 개척을 위해 변방을 누비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경을 확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고 아울러 지방관으로 나아가서는 물심양면으로 백성을 보살피는 등 보국충정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다.

     

    또한 단종이 왕위를 찬탈 당하자 스스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굽히지 않으셨으니, 이는 마땅히 나주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군육진(四郡六鎭)개척하면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을 떠 올린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은 이 두분이 당시 최고 지휘관이므로 당연히 두분의 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러한 공적은 국토수호를 위해 최일선 전장에서 여진족과 직접 맞닥트려 죽음을 무릅쓰고 결전을 벌린 현장 지휘관 및 병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으로 커다란 공적을 기리는 그 이면에는 그 공적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전투현장 지휘관과 병졸들의 숱한 고초와 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공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의 업적은 그간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었는데 2016년 당시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및 나주시 문화원을 중심으로 나주의 인물로 선정하고 충숙공 김수연 장군 선양사업회 추진위원회(위원장 임경렬 나주시문화원장, 사무총장 김성대)를 결성하여 공의 업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와 새로운 조명을 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본인도 휘 김수연 장군의 DNA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써 선양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장군의 인생관이 후세에 길이 남을 금과옥조(金科玉條)내지 사표(師表)가 되길 희망해 보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독자들이 공감하도록 하기위해 정리하여 글을 남긴다.

     

    ▲ 참고자료: 김해김씨 시중공파 카페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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