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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유신(1868~1945)과 옛 조슈번(長州藩)의 정치세력

기사입력 2020.10.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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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타임뉴스 = 김두만기자] 

     

    1800년대 중반 일본의 정치 중심세력이었던 막부의 몰락과 천황의 친정체제를 원하는 새로운 개혁 신흥세력의 등장으로 자본주의의 여명이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 근대화의 발판이 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탄생했다. 

     

    즉, 임진왜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후 1600년도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실권을 잡았으며 이후 토쿠가와를 추종했던 막부세력들은 권력을 독점하다가 250여년이 지난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막부세력은 기강해이로 인해 열강들과 싸울 때마다 매번 패전하여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맺었으며 전쟁비용에 대한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주는 책임을 안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 그간 지배 체제로부터 소외받았던 하급 사무라이들과 신흥 상인들을 중심으로 무능한 막부를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었는데 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논리를 펴며 천황 중심의 정치 체제를 열망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한 원동력이 되었다.이 때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던 인물들은 옛 조슈지방(현재: 야마쿠치縣)의 출신들이 다수이다.  <야먀구치縣>은 대한민국과 제일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이 포로로 잡혀가 가장 많이 정착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도 야마쿠치현 야쿠자(山口組)는 일본내에서 최대의 폭력조직으로 그 악명이 높다.    

     

     이 지역 출신들은 호전적인 기질이 있어서인지? 메이지 유신 이후 출세와 함께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자들이 많았다.  조선정벌을 주장했던 자들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이후 세대의 정한론자(征韓論者) 들이다.  

     

    정치세력으로 文官대표로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1841~1909년)」이며 武官대표로는 「야마카타 아리모토,1838~1922년」이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1841~1909년)」는 1885년 12월,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고, 제4차 내각까지 조각(組閣)하는가 하면, 明治憲法 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1905년에는 조선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했고, 동년 12월에는 초대 조선통감(朝鮮統監)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安重根 의사가 발사한 권총 세 발을 가슴에 맞고 절명했다.그는 한국의 유림들에게 자신은 중국 전국시대의 名宰相 "정자산(鄭子產)"에 비유하였으며, 일본 국내에서는 동양의 <비스마르크> 라는 소리를 듣고자 했다. 또한 그는 영국의 <크로머> 백작을 모델로 삼았다.    

     

     ★ 크로머 백작: 1882년 이집트가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될 당시 대영제국의 총영사로 이집트 내에서 부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20년 지배자로 군림하였던 인물임.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는 「일본 육군의 敎皇(교황)」이라 불리었다. 그는 明治시대를 통틀어 일본제국의 軍과 정부에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본 군인들의 정신지표인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또한 「가쓰라 다로(桂太郞·1849~1913)」는 일본제국이 무력을 감행한 침략정책의 원흉이다. 총리대신 재임 시절에 英日동맹을 맺고 러日전쟁을 감행했다.  러日전쟁 직후인 190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와 가쓰라-태프트 密約을 맺었으며 이 밀약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1910년의 韓日합방은 그의 제3차 내각총리 시절의 일이었다. 가쓰라는 조슈군벌의 제2인자였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系이다.     

     

     「기타 조슈벌 일본 육군 군벌의 인맥」으로는  Ⓐ 야마카타, 카스라(총리),Ⓑ 데라우찌 (조선총독,) Ⓒ 다나카 기이치(육군성 군무국장), Ⓓ 우가키 가즈스끼(육군성군사과장 . 후에 육군대신, 조선총독역임)등 이 있다.  

     

     한편 「일본의 침략전쟁」은 Ⓐ 청일전쟁(1894~1895)을 시작으로 Ⓑ 러일전쟁(1904~1905) Ⓒ 칭다오(청도)침공(1914): 제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조차지 차지 Ⓓ 시베리아혁명 시 출병(1918~1922)Ⓔ 러시아혁명의 간접전쟁(1917) Ⓕ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9~1945) Ⓗ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마감한다.    

     

     또한 메이지 유신자들은 대륙의 침략야욕을 불태우며 자국을 중심으로 주권선과 이익선으로 구분하여 침략의 야욕을 불태웠다.즉, 주권선(主權線)은 일본 내의 강역을 나타내며 이익선(利益線)은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으로 조선과 중국을 말한다. 

     

     이러한 침략에 대해 정신적인 지주가 된 자는 독일의"로렌츠 폰 슈타인 교수”이다.  그는 독일 빈 대학 국가학의 권위자로써 메이지헌법 제정 당시 야마가타 및 이토에게 독일식 입헌군주제를 조언하였으며 조선의 통치 시 중립화 유지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아베 전)총리가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이러한 주권선 및 이익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한제국의 구식군대는 1907년에 해산된 이후 조선증사(增師) 논란이 벌어진 1912년까지 의병을 조직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본군과 게릴라 전법으로 싸웠으며 이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의병은 17,676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1907년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투쟁은 보다 조직화·전국화 되었다는 기록이다.이에 질세라 <이토히로부미>는 본국의 육군대신에게 군대 증파를 요청하는 한편, 조선군사령관에게 헌병과 경찰을 집중시켜 주고 철저한 토벌을 요구했다.    

     

     그 후 일본군은 三南(삼남)지방에서 악명 높은 攪伴(교반) 작전이란 것을 자행했다. 그 작전은 일정지역을 의병의 중점 활동 지역으로 지목한 후 완전포위하고, 화력과 총검으로 줄을 세워 전후좌우로 무논에 써리질 하듯 휘젓는 것이 교반이었다. 무고한 조선의 양민들까지 처참하게 도륙 당한 것이다.  

     

    그 이후 일본군대는 항일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전국110여 개소에 일본군을 분산하여 주둔시켰다는 기록이다.  끝으로 「아베 노부유키(1875년 ~ 1953년)」는 전)일본 수상 <아베>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총독을 역임했다.그가 이 땅을 떠나면서 남긴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 일본은 한국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그들이 자신의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들 조상의 무위, 무능, 약행을 들추고 과장해 후손들에게 가르치라.” 참으로 무서운 저주이다.

     

     공교롭게 <아베>도 야마구치縣 시모네시키 출신이다. 할아버지의 유지(遺志) 받들려는 것인지, 이미 하차하였지만 아베의 행보에 의심할 여지가 많았다.우리는 이 시간 까지 위안부 문제을 위시하여 해결되지 않은 사안들이 너무 많다. 

     

    이번 추석연휴 TV를 통해 영화 「봉오동 전투」를 감상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국선열들의 조국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아베조부가 한 말은 우리는 잊지말고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일본의 전범(戰犯)기업의 하나인 「아사히 카세이」 회사가 배터리 분리막을 만드는 국내 중소기업을 상대로 특허소송을 제기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우리 대법원의 일본의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 판결과 관련, 일본은 보복차원에서 수출규제를 하였던 바 이 보복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기업들이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에 성공하자 이에 맞서 일본 기업이 우리 기업에 대해 수출규제 이후 처음으로 특허를 침해하였다고 소송을 건 것이다. 

     

     소송이 제기되면 우리나라에서 제품을 수입하는 제3국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인식시켜 일본은 자기나라 제품의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있다.이와 같이 일본은 총칼만 안들었지 여전히 호전(好戰)적이며 지금도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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